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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재 북리뷰] 오바마와 트럼프, 그리고 미 대기업 CEO들을 사로잡은 미국판 ‘富國 보고서’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 - ‘중국과 일본 한국에 뺏긴 제조업 주도권을 어떻게 되찾아올 것인가?’

관리자

2019.05.14

중국은 지금도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5개년 계획’을 시행하는 나라입니다. ‘제조 2025’ 처럼 중장기 국가 산업정책의 기조를 담은 계획도 나옵니다. 계획이 나오면 각 산업 부분과 기업들이 여기에 발을 맞춰 움직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미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 주도 산업정책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 나라라고 합니다. 없었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미국이 오바마 정부 시절인 2012년 ‘제조업 르네상스(Manufacturing Renaissance)’라는 이름이 붙은 산업정책을 내놓습니다. 내용은 해외로 나간 제조업체들을 다시 미국의 국경 안으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에서부터 스마트팩토리까지 실로 다양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저환율 정책이 미국 제조업체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인센티브였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2004년 미 대선 때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 민주당 상원 의원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매국노 기업의 CEO들”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외국으로 공장, 심지어는 본사까지 옮기는 회사와 그 CEO들을 겨냥한 비난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굴뚝 산업, 러스트 벨트가 핵심 사회문제가 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그것은 일자리의 문제이거나 일부 지역의 문제였을 뿐 ‘미국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수의 경제학자들이 “미국 제조업의 쇠퇴는 서비스와 혁신을 중심으로 한 지식 기반 경제를 향해 가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발전과정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은 제조업발전 국가협의체를 발족해 제조업 부흥 정책을 폈다. (사진: Official White House Photo by Pete Souza)

전환점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였습니다. 오바마는 집권 첫해인 2009년 ‘Remaking America’라는 슬로건 아래 ‘제조업발전 국가협의체’를 만들었습니다. 이어 3년여의 준비를 거쳐 2012년에 시행에 들어간 것이 ‘제조업 르네상스’였습니다. 트럼프는 ‘Anything but Obama’였지만 이 정책만은 고스란히 계승했고 오히려 여기에 몇 술을 더 얹었습니다.

오바마와 트럼프의 이 제조업 부흥 정책은 중국 제조업 굴기와 미국 제조업 후퇴가 상징적으로 대비되던 시기에 나왔습니다. 이는 값싼 제조업을 저개발국가에 외주하고 미국은 기술과 설계력으로 번영을 거듭할 수 있다고 믿던 통념을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후일 미국 산업의 일대 전환이었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전환에는 금융위기, 중국 부상 외에도 여러가지 요소가 필연 또는 우연적으로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그 중 중요한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다고 합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교수인 개리 피사노와 윌리 시가 2009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게재한 논문을 보완하고 대중적으로 해설한 책입니다. 2012년에 ‘하버드비즈니스리뷰프레스’에서 출판했고 지난 4월 국내에 번역 출판(지식노마드)됐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교수 개리 피사노와 윌리 시의 저서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는 제조업을 잃는다는 것은 국가경쟁력을 잃는 것이라 주장한다. (사진: scrumtzu.com)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제조업을 잃는다는 것은 그 제조업 자체 또는 일자리 만을 잃는 것이 아니다. 값싼 가전 공장을 아시아에 보낼 때 그것이 나중에 전기자동차 배터리로까지 이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조업을 잃는다는 것은 과학과 기술, 심지어는 국가경쟁력을 잃는다는 뜻일 수 있다. 많은 산업에서 똑 같은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결국 제조업 쇠퇴는 당연한 것이거나 미국의 길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는 길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입니다.

이 책은 ‘산업 공유지(commons)’라는 개념을 씁니다. 근세 유럽에서 가축들에게 목초를 먹이는 공유지를 둬서 생산성을 끌어올렸던 것처럼 제조업에도 이 개념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산업단지’와 비슷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훨씬 포괄적이고 깊은 개념입니다. 기술 노하우, 경영능력, 전문기술을 갖춘 노동력, 경쟁사, 공급사, 고객사, R&D와 벤처, 대학 등이 지리적으로 근접하고 가치사슬을 이뤄야 경쟁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 기술역량만 남기고 제조업체를 분리, 또는 외국으로 외주했을 때 예상을 뛰어넘는 부작용이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저자들은 경제와 산업의 여러 거시적 미시적 사례를 듭니다. “산업은 분리된 경제 단위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몇 구절 보겠습니다.

<권총이 자동차를 낳다>

1855년 미 연방은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 연방 병기공장을 설립한다. 여기엔 민간 소유 콜트식 권총 공장이 있었다. 이 지역에 도구 제작자들의 네트워크가 생겼는데 후에 정밀 금속 공구를 제조하는 업체로 나아갔다. 이 지역 재봉틀 공장 기술자들은 후에 시계, 자전거, 기관차, 자동차 기술자가 되었다. 프랫앤휘트니는 총기 제작기계와 재봉틀 제조에 필요한 공구 제작소로 시작해 항공기 엔진 제작사가 됐다.

코닥이 만든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

<코닥, 디지털을 먼저 시작했다가 카메라를 잃다>

코닥은 30년 전(2012년 기준) 필름 카메라를 포기했다. 1994년 디지털 카메라를 최초로 내놓았다. 흠잡을 데 없는 논리에 따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카메라산업 주도권이 니콘, 캐논 같은 일본 업체들로 넘어갔다.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의 연구개발과 설계, 시험을 하고 부품공급은 일본 업체들이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생산 공정은 훨씬 복잡했다. 연구개발과 설계, 생산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지만 그 땐 이미 늦었다. 나가노현 스와 지역엔 카메라와 휴대용 소형 가전제품 공유지가 형성돼 있다. 시계 프린터를 만드는 세이코 엡손, 줌렌즈와 광학부품을 만드는 니코 고가쿠, 디지털로 영상을 담는 CCD센서를 만드는 소니와 마쓰시다, 이 외에도 금형 사출 셔터버튼 플래시 배터리를 생산하는 중소업체들의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코닥은 로체스터에 있던 카메라 조립 라인을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 소프트웨어를 제외한 디지털 카메라 설계 부문까지 일본으로 보냈다.

저자들은 제조업을 소홀히 하면서 미국 내 ‘산업 공유지’가 붕괴됐고, 이것이 미국 제조업의 결정적 쇠퇴를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산업 공유지’의 복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핵심 주장은 세가지입니다. 1. 한 국가가 제조 역량을 잃으면 혁신 역량을 잃는다. 2. 산업 공유지는 성장을 위한 플랫폼이다. 3. 산업 공유지의 쇠퇴는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 경영 및 정부 정책 실패의 결과다.

저자들은 “오직 미국의 관점에서 이 책을 썼다”고 책에 썼습니다. 그렇다고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부작용과 미국으로 돌아올 부작용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몇 년이 흐른 뒤 트럼프 행정부는 이 제조업 중시정책은 고스란히 이어받고 동시에 보호무역주의까지 결합시켰습니다. 그 첫 타깃이 중국이라는 것은 지금 보는 대로입니다. 결국 트럼프의 목표는 미국 내 일자리 증가나 무역적자 감소 같은 수준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2012년 출간된 뒤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책을 추천한 사람들 명단엔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 겸 하버드대 명예총장, 윈델 위크 코닝 회장, 찰스 베스트 국립공학아카데미 회장 겸 MIT 명예총장, 레지나 두간 모토로라 수석부사장 겸 미 국방고등연구기획국(DARPA) 이사,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크라이슬러 회장 겸 피아트 CEO 등 거물들이 다수 들어 있습니다.

한 두 사람만 볼까요? 서머스는 “미국 경제의 미래를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면밀히 숙고하며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간은 “매우 동감한다. 미국은 지금 제조업 르네상스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책은 한국 정부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작년말 산업통상자원부는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제조업 르네상스 전략을 우리 사회의 담론으로 삼고”라고 했습니다.

이 책은 미국 출판 7년 후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한국 출판 문화의 한계를 느끼는 동시에 늦게라도 이런 책이 나왔음에 안도합니다. 200페이지 정도 분량에 내용도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아 빠르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경제나 산업에 직접적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많이 읽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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