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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2020 ② / 외교·안보]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미·중 GDP 合 ‘35조 달러’의 향배, 이것이 우리의 최대 문제”

정리·이윤서 SD

2020.01.05

“세계 수준 중국연구소, 미중관계연구소 하나 없는 현실 말이 되나”

2019년은 한반도 안보 지형에 근본적 변화가 표출되기 시작한 해로 기록될지 모른다. 북한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일 관계가 더 이상 이전의 한일 관계가 아니며, 한미 동맹까지도 이전의 한미 동맹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 이것이 중단기적 조정에 해당할지, 아니면 기축의 이동인지 현재로선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생존 전략이 앞으로도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을 만나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느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긴 호흡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얘기를 들었다. 하 이사장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을 대표하는 안보 전략가다. 서울대 외교학과에서만 3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북·미 간 좁히기 힘든 거리 있다”

Q. 북한 문제부터 듣고 싶다. 크게 보자면 2016~17년 전쟁위기에서 2018년 평화로의 전환을 거쳐 2019년 그것이 제도화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역시 섣불렀던 것 같다.

A. 전쟁위기였다는 것부터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이나 북한 모두 전략적 차원의 위협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대역전극이 벌어졌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또다시 전쟁위기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있지만 나는 그것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폭력 도박’과 ‘돈 도박’에서 여전히 돈을 건 도박을 하지 생명을 건 군사적 도박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도 여전히 유훈 통치적 한계 내에서 새로운 생존전략을 찾아보려고 하기 때문에 보다 신중하게 봐야 한다.

Q. 무엇이 문제라 보는가?

A. 북한과 미국 입장에 좁히기 힘든 거리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은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 보다 진전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는 전략적 결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이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다. 이게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정부도 움직이기 어렵다. 앞으로도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Q. 북의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A. 그동안 나온 입장을 종합해보면 북은 3단계 비핵화로 가겠다는 거다. 1단계는 동시가 아니라 선행(先行) 신뢰조성 방안이다. 북한은 핵 실험장을 먼저 폐쇄하는 등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다. 그렇게 하면 한·미 합동군사훈련, 전략물자의 한반도 전개 등에서 미 측의 상응하는 조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거다. 2단계는 과거 핵의 일부인 영변 핵시설의 사찰과 폐기를 받아들이는 대신,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작년 10월) 스톡홀름 실무협상에서는 보다 세련된 표현으로 ‘생존권’과 ‘발전권’이라는 상응조치를 요구했다. 생존권은 종전선언을 포함한 체제 보장이고, 발전권은 제제 완화나 해소다. 그리고 3단계는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핵과 미사일 포기인데, 그렇게 하려면 핵군축회담을 거쳐 완전한 생존권과 발전권을 보장해달라는 것이다.

“북, 완전 비핵화 여전히 결단 못해”

Q. 어떻게 평가하나.

A. 김일성, 김정일 때의 ‘선(先) 체제 보장 - 후(後) 비핵화’와 비교해서 김정은의 1단계 선행 신뢰조성 조치는 새롭다. 2단계의 영변 핵시설 폐기와 생존권, 발전권 보장의 병행도 과거보다는 어느 정도 유연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을 낙관적 시각에서 보면 3단계 완전 비핵화까지 계속 진행될 것으로 기대하게 되고, 비관적 시각에서 보면 2단계 중반까지도 진행되기 어렵다. 하노이 정상회담이 깨진 것은 이 간극에 근본적 이유가 있다. 북한이 2단계에서 영변 핵시설을 검증받고 폐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미국은 영변만으로는 안 되고 플루토늄뿐만 아니라 농축우라늄을 포함한 ‘영변+α’를 요구했다. 미국 입장은 3단계에 대한 북한의 결심을 최소한 2단계에서 약속받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완전 비핵화의 3단계에 대한 전략적 결단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3단계를 보장하는 2단계를 요구하니까 북한이 거부한 것이다. 반대로 북한은 3단계의 완전 비핵화를 위해서는 완전한 생존권과 발전권을 보장해달라고 주장하지만 미국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생존권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폐기’, 구체적으로는 주한미군이나 전략물자의 한반도 배치와 전개 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완전히 바꾸기 전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미 대선이 남은 변수
어설픈 합의 나올 수는 있다”

Q. 북이 3단계, 완전한 비핵화 결단을 할 수 있을까?

A. 어렵다고 본다. 북한은 미국에 새로운 셈법을 요구하고 있는데, 미국도 북한에 새로운 셈법을 요구하고 있다. 양쪽 모두 새로운 셈법을 가지고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단 변수는 미국 대선이다. 트럼프가 현재 탄핵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재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트럼프가 북한 변수를 선거에 쓰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북핵 문제를 대선에 활용하려 해도 ‘완전한 비핵화’와 ‘완전한 생존권과 발전권 보장’의 교환은 어렵다. 따라서 한 번 더 정상회담을 하고 합의가 나온다 해도 어설픈 내용이 될 것이다.

Q. 어설픈 내용이라면?

A. 동결이 될 것이다. 북이 요구하는 생존권과 발전권도 적당한 선에서 처리될 것이다. 예컨대 북이 이행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단 ‘부분 해제’ 같은 것이다. 생존권은 종전선언 포함하는 것으로 하고. 하지만 북한이 3단계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미국에도 완전 비핵화 대신 동결에 머무는 데 대해 강한 반발이 있다. 미국에게 북한의 완전 비핵화는 단순히 북한 문제가 아니라 세계질서의 핵 확산 문제이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를 위해서 잠정적으로 동결하더라도 북한 핵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Q. 우리 정부는 제대로 대처해왔다고 보나?

A. 우리 정부는 2018년 3월 대북 특사가 평양을 다녀와서 북이 ‘비핵화 결단’을 한 것으로 발표했다. 그런 입장이 대외용이었는지, 내부적으로 그런 판단을 했는지는 말하기 조심스럽다. 하지만 북한이, 한국과 미국이 기대하는 완전 비핵화를 결정했다고 판단했다면 오판이었다. 제한된 정보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너무 의존하면 전략적 안목으로 읽어야 할 큰 그림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가 있다. 우리는 국제 관계나 남북 관계를 너무 정무적 차원이나 남북 관계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북한을 제대로 보려면 김정은 위원장의 정책결정 지평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제국의 역사적 체험이 있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생각을 제대로 보려면 관련 당사국들의 안목과 지평을 우리의 주관적 심안(心眼)이 아니라 제국적 심안으로 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일방적 제재, 일방적 포용 모두 실패
北 진화 끌어낼 복합전략 필요”

Q. 그래도 국민들이 전쟁 불안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은 사실 아닌가?

A. 전쟁 불안감이라기보다는 ‘군사적 긴장 위협’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 문제는 지난 반세기 동안의 역사적 실험을 돌아보면 답이 나와 있다. 일방적인 제재나 일방적 포용 정책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재, 억지, 포용과 함께 북한의 내재적 진화가 복합적으로 추진되지 않는 한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는 얘기를 오랫동안 지적해 왔다.

Q. 문재인 대통령이 연말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에서 “북한이 진정성을 갖고 비핵화를 실천해 나간다면 국제사회도 이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제재 완화 또는 해제를 주문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A. 그런 공동진화적 해결책의 모색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온 얘기다. 문제의 핵심은 북한이 어떻게 진정성 있는 비핵화를 21세기의 새로운 생존전략으로 추진하도록 하느냐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현재 완전한 비핵화를 새로운 생존전략으로 결정하지 않고 있고, 미국을 비롯한 관련 당사국들은 진정한 비핵화 없이 북한이 요구하는 완전한 생존권과 발전권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제를 풀려면 공진(共進)의 구체적 대안과 실천이 필요하다.

Q. 어떤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보나.

A. 북한은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핵경제발전’이라는 병진노선을 신생존전략으로 선택하는 정책적 결단을 진정성 있고 투명하게 해야 한다. 관련 당사국들은 여기에 병행해서 비핵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는 복합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하며, 경제제재 해제는 물론 21세기의 ‘마샬플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구차원의 북한 경제지원 계획을 준비해야 한다.

“지소미아 사태,
日 악수에 더 큰 악수로 대응한 셈”
“지소미아는 美 인태 전략의 상징
자꾸 만지작거리지 말아야”

Q. 지소미아 문제로 넘어가 보자. 연장에서 폐기로, 폐기에서 조건부 연장으로 국면이 요동쳤다.

A. 경제 제재는 일본이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우리가 지소미아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응했으면 일본이 굉장히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악수에 더 큰 악수를 둬버린 셈이 됐다고 생각한다. 일본 문제의 키는 역사 문제다. 일본이 투 트랙을 원 트랙으로 바꿔 역사문제를 경제로 해결하려 할 때는 그 자체로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악수를 악수로 받다 보니 바둑으로 치면 선수가 후수가 되어버린 거다.

Q. 결국 판단 미스가 있었다는 얘기인가.

A. 우리는 지소미아를 한일 간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협정이 실제 가동된 적이 별로 없다든가, 대북 정보는 우리가 앞선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소미아를 관찰할 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미국이 21세기 세계질서를 인도-태평양을 기축으로 재건축하면서 가장 중요한 무대가 어디겠는가. 기술정보 무대와 군사 무대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이러한 두 무대가 결합한 정보군사 무대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소미아는 단순히 한일간의 협정이 아니라 인도태평양전략의 근간을 이루는 대표적 상징물의 하나다. 우리가 그것을 뽑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는 우리 정부가 아직도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소미아와 미국이 생각하는 지소미아는 너무나 다르다. 일본이 경제 제재를 해제하지 않으면 지소미아를 다시 꺼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명백한 오판이다. 자꾸 만지작거리고 있을수록 미국은 자신들의 기본 질서를 왜 자꾸 건드리냐고 할 것이다. 제국을 경영해보지 않은 중진국으로서 주변 제국들의 마인드를 미리 읽어 내고 선수를 두지 않으면 생존 바둑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제국적 마인드를
읽을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Q. 제국적 마인드를 읽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A. 제일 간단한 것은 우리가 제국 한번 해보는 것이다(웃음). 좋은 의미에서 제국적 마인드는 오랜 시·공간 경험 속에서 체현되는 것이다. 1972년에 키신저와 주은래가 협상할 때 키신저가 ‘우리는 협상이 10년 정도 걸려도 좋다’고 하니까 주은래가 ‘우리는 역사를 그렇게 짧게 보지 않는다. 100년 후를 본다’고 대꾸하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이라는 제국을 수천 년 겪어 온 우리 역사도 길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반추해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수동적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오늘날 한반도라는 좁은 시·공간을 끊임없이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상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한 번도 그런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을 기회가 없었다.

상상력 트레이닝은 학자뿐만 아니라 대법관들에게도 필요했다고 본다. 대법관들이 우리가 처한 시·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있었더라면 (징용자 문제에 대해) 우리 입장도 확보하면서 일본 사람들의 대응까지 예상해서 묘수를 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교부는 단순 행정가만 늘어나,
통일부는 국제 감각 빈곤 벗어나야”

Q. 지금 우리 대학들이나 학계는 어떤가?

A. 내가 있었던 서울대 외교학과 같은 경우 과거에는 국내의 외교관과 국제정치학자들을 양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졸업생이 로스쿨 준비를 한다. 현재 한국의 로스쿨이 21세기 시·공간 훈련을 제대로 시킬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미국의 백악관, 중국의 주석실, 일본 총리실, 평양의 위원장실에서 벌어지는 전략회의의 내용을 단순히 정보 수집에 의존하지 않고 전략적 상상력으로 주변 국가들의 전략 구상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을 보면 외교부에서는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력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단순한 외교 행정가들만 늘어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청와대에서도 주변 강대국 외교나 남북 관계에서 관련 당사국들의 언행을 제대로 해석해서 선수로 묘수를 두는 안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외교사 알지 못하고
어떻게 자율적 외교할 수 있겠나”

A. 미래의 전략적 사고를 담당해야 할 학생들이 모두 로스쿨을 가는 병폐를 고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국제정치적 상상력의 유전인자가 있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이 선천적 자질을 계속 개발해서 한평생 먹고살게 해주면 된다. 그런데 직장을 잡을 수가 없다. 내가 서울대 33년 동안 국내 박사 10명을 배출했다. 그런데 내가 잘못 판단한 게 있다. 한국 외교 정책이나 한국 외교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가르치지 않으면서 나라가 자율적인 외교를 구상하고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외교사와 한국 외교 정책 분야의 국내 박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학위를 받고서도 해당 분야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제대로 성장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풍토는 학계만의 현실이 아니다. 외교부도 북한 핵문제를 다루면서 제대로 북한식 계산법을 읽지 못하고 있다. 통일부는 국제 감각이 절대적으로 빈곤하다. 지금이라도 달라져야 한다.

“주요 대학 정치외교학과
미국 학계 하청 연구 빠질 위험”
“한국 생존전략 백년대계
주변 강대국서 빌어올 수는 없어”

Q. 자율적 외교를 뒷받침할 풍토가 아니라는 이야기,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A. 최근 국내 미국 유학 박사들의 상당수는 국내 학계보다는 미국 학계의 활동을 훨씬 더 중시하고 있다. 물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외교적 문제에 대한 세계 지식과 질서를 최대한 연구하고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풀어야 할 정치외교적 문제를 제대로 설정하고 해답을 꿈꾸는 노력은 자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미국 학계의 하청 연구에 빠질 위험성이 높고, 학계의 노력이 현실에 별다른 기여를 하기 어렵게 된다. 두 가지 노력이 시급하다. 국내 주요 대학 정치외교학과의 교과목을 보면 놀랍게도 한국 관련 정치외교 과목들이 독립국가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빈약하다. 최소한 한국정치외교사, 한국정치론, 한국외교정책에 관한 과목과 전임교수가 대폭 강화되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영어 SSCI 논문 쓰기를 지나치게 연구 평가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국내의 1급 연구자들이 보다 자유롭게 지적 분석력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

제국적 안목을 역사적으로 키우지 못한 우리가 공간을 넓게 읽는 훈련도 안 되어 있지만 시간을 길게 보는 훈련도 없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를 보면 18세기 말 동아시아 관계를 그렇게 예민하게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중국을 바로 보고 제대로 다루는데 가장 탁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 전공한 후배 연구자들을 만나 『열하일기』를 읽어봤냐 물어보면 미국 중국 일본 자료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읽을 겨를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생존전략의 백년대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21세기의 연암적 안목이 최우선적으로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것을 주변 강대국에서 빌어올 수는 없다.

“미국과 중국을
제대로 알고 활용할 수 있어야”
“초당파적 미중연구소
하루빨리 만들어야”

Q. 어떻게 하면 이런 풍토가 개선될까?

A. 기회는 있다. 한국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미중을 동시에 실존적으로 깊이 고민해야 하는 나라들 중 선두에 서 있다. 워싱턴 베이징 도쿄를 돌아다니면서 밤잠을 자지 않고 정보를 모으고, 학계는 분석을 위한 큰 그림 그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구멍가게 수준의 노력으로 제국들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한국 가면 세계가 보인다고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21세기 한국의 최대 숙제는 미중을 제대로 알고 활용해서 천하통일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남북통일은 작은 문제다.

우리 삶이 중국의 영향을 그렇게 받는데 세계 수준의 중국연구소가 있나 생각해보면 찾아보기 어렵다. 미중의 어깨 위에 올라서려면 그들의 머리와 가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세계 수준의 중국 싱크탱크, 미중 싱크탱크를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 국영이 되면 관료화되고 정권 변화에 따라 지나치게 영향을 받으므로 초당파적인 민간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 같은 경우는 정책 연구 분야에서는 대학 보다 훨씬 큰 영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우리 경제 규모가 그런 것을 못할 정도 아니지 않나.

Q. 미중연구소, 중국연구소의 필요성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 같다. 그것을 만드는 데 있어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A. 첫째가 구상이다. 그 다음이 사람이고 세 번째가 돈이다. 그동안 이런 생각 왜 안 했겠느냐. 이명박 대통령 때도 대형 중국연구소를 만든다고 기금을 먼저 모으다가 결국 실패했다. 그러니 구상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구상을 현실화할 수 있는 사람을 모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선 생각 있는 사람은 돈이 없고 돈 있는 사람은 생각이 없다.

“미·중은 남북문제도
미·중문제로 본다”

Q. 국제관계 변화 속에서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목은 무엇이라고 보나.

A. 남북한을 합쳐도 인구 8000만, GDP 2조 달러가 안 된다. 전 세계 GDP는 90조다. 21세기 최대 문제는 미·중이다. 금년에 미국 GDP 21조 달러, 중국 GDP 14조 달러로 예상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이 5조 달러, 아세안 3조 달러다. 우리의 통일문제는 지난 세기에 숙제를 안 했기 때문에 빨리해야 되겠지만 더 큰 것은 35조 달러나 40조 달러를 어떻게 할 것인가다. 시각을 뒤집어보아야 한다. 남북 문제만 해도 미국이나 중국 모두 미중 문제로 보지 순수하게 남북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미중 35조’ 문제를 다뤄가는 데 있어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의 지역 전문가나 국제경제 같은 기능 전문가들에게서 지혜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지역 전문가 보다 중요한 것은 글로벌 전략가다. 중진국은 큰 나라들 보다 한 수 위의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경쟁할 수 있다. 지역 전문가들의 사고는 시·공간의 한계에 잡혀 짧을 수밖에 없다. 지구 전략가를 하루빨리 키웠으면 한다.

“미·중 갈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과 에너지”

Q. 미중 갈등 국면이 장기화될 경우에 대비해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A. 우선 생각을 해야 할 것은 미중 갈등과 관련한 국내 논의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한 쪽에선 미국이 여전히 압도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다른 한쪽에선 중국이 쉽게 따라잡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러한 소박한 미래 전망 속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안 터지기나 돌고래로 살아남기 수준의 논의가 정책당국자, 학계, 언론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현재 미중관계의 바둑판은 포석이 상당히 전개되어서 넓게 보면 경제, 기술, 에너지, 군사의 네 무대에서 복합적 경연이 벌어지고 있다. 먼저 군사 무대를 보면 현재 군사비가 미국 7000억 달러, 중국 2000억 달러인데 중국이 2050년 어간에 1인당 GDP 3만 달러가 되면 비슷하거나 중국이 조금 적은 수준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첨단 무기체계에 대한 지속적 투자나 배치 등을 볼 때 21세기 말까지 미국은 세계 군사 무대를 주도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중국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은 모두 군사적으로 전면적으로 충돌할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두 번째 미국이 유리한 무대는 에너지다. 미국은 셰일혁명 등으로 상당 기간 에너지 수출국으로서 안정적 국면을 유지할 것이다. 고도 경제성장에 따라 에너지 수입국의 위치에 있는 중국이 러시아의 가스와 중동의 석유를 확보하더라도, 미국이 중국을 코너로 몰 수 있다. 경제 무대에서는 무역 금융 분야 등에서 미중 갈등이 진행되고 있지만, 미중 경제의 상호 보완성 때문에 미중이 전면적 경제전쟁을 치르기는 불가능하다. 14조 GDP의 중국 경제가 약화되면, 21조 GDP의 미국 경제도 흔들린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결전 무대는 기술이 될 것이다.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첨단 기술의 변혁 분야에선 미국이 여전히 무대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고, 실용적 상업화 분야에선 전력투구하고 있는 중국의 추적이 가속화될 것이다.

“독자적 신남방정책 불가능
어떻게 살아남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A. 우리는 큰 흐름을 보되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군사 무대에서 직접적으로 충돌할 생각이 없으므로 우리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미중 경제는 경쟁과 협력이 불가피하게 공존하고 있으므로, 한국도 그 범위 안에서 운신의 폭을 찾아낼 수 있다. 이 입장을 미국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에너지 무대는 상대적으로 어렵다. 미중의 에너지 무대가 협력보다는 갈등의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에너지 빈국인 일본은 아태에서 벌어지는 에너지 냉전에서 확실하게 미일 협력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에너지 빈국인 한국도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남방 정책은 용어 자체도 21세기적이지 못하므로 새로운 검토를 할 필요가 있다. 아세안도 미중의 바둑 속에서 봐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독자적 남방정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복합적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이 인태 전략 추진하면서 내놓은 국무부와 국방부 보고서들을 보면 첫 번째 항목이 아세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국과 중국의 어느 한편에 줄을 서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신 ‘보편적 가치’를 얘기한다. 미중 간에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규범 외교의 현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중간에서 눈치껏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품자고 하는 관념적 제안은 이미 빛바랜 얘기다. 구체적으로 4대 무대별 중장기 복합 대책을 세워야 한다. 대책 마련을 위해서는 해당 지역 전문가와 21세기 지구 전략가가 함께 머리와 가슴을 맞대고 집단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리는 중견국으로서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야 한다.

“한미 관계 균형 대통령이 잡아야”

Q. 한미 동맹도 전환기를 맞고 있는 듯하다.

A. 한미 관계는 지난 2년 반 동안 좋아지기보다는 나빠졌다. 지금은 신뢰관계를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면 ‘(한국이 미국을) 떠나는 거냐?’ 같은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모두 실용외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물론 한국 내에 미국이나 일본에서 자유로워져서 남북 관계를 보다 독자적으로 처리하면 안 되느냐는 목소리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권력을 담당하는 중추가 대외 정책을 수행해나갈 때는 한쪽의 목소리만 경청할 수는 없다.’ 이런 다양한 생각들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국가이익과 아태지역 이익을 위해서 대통령이 중심을 잡아서 운영해 가야 할 것이다.

평택 미군 기지(Camp Humphreys) 전경 (출처: flickr)

“평택은 아태 최전진기지
미국은 그 중요성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Q.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 요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A. 한미 간의 방위비 분담 문제도 달리 볼 필요가 있다. 주한미군의 통합기지인 평택은 동시에 미국의 아태 최전진기지로서 자리 잡고 있다. 한일 관계가 안 좋아지니까 일본의 안보 전문가들이 ‘한국 없는 일본’ 얘기를 조심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평택 없는 일본은 오키나와를 아태 최전진기지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평택 같은 군사기지를 아태지역에 새로 지으려면 천문학적 경비가 들 것이다. 얼마 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열렸던 회의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주한미군은 북한 방어를 위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인도 태평양전 전략의 핵심적 군사 기반으로 존재한다는 이중성을 미국은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군도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을 막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는 일본, 중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안보와 번영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한국군에 대해서도 관련 당사국들이 비용 분담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와 아태지역에서 이중적 역할을 하고 있는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이미 방위비 분담을 하고 있는 셈이므로, 한국에 방위비 분담을 추가로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일본을 비롯한 관련 당사국들이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방위비를 적절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국을 비롯한 관련 대상국들이 스스로 하게 만들어야 한다.’

“워싱턴 싱크탱크의 아태 연구는
일본의 영향권 안에 있다”

Q. 한국과 일본의 대미(對美) 외교 역량에 큰 차이가 있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됐다. 그런데도 변화가 없다.

A. 일본은 워싱턴에 연구비 폭탄을 쏟아 붓고 있다. 워싱턴 싱크탱크들이나 대학의 주요 아태 연구에는 이미 깊숙하게 일본 연구비가 프로젝트 형태로 들어가 있다. 따라서 일본의 국가이익이 상대적으로 훨씬 잘 반영되고 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한국이 공공외교 형태로 한국의 국가이익을 국제회의 같은 일회성 만남으로 설득해 봐야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의원회교도 마찬가지이고 공관 활동도 한계가 있다.

Q.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 브랜치를 국내로 유치할 수는 없을까?

A. 쉽지 않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필요하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온다. 베이징에는 미국의 중요 싱크탱크들이 다 들어가 있지 않나. 국제 콘퍼런스는 들어가는 노력과 경비에 비해서 성과는 적다. 브랜치를 유치할 생각보다는 한미 간에 공동 관심사를 공동으로 연구하는 방안을 강구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국가이익이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Q. 문재인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A. 지난 2년 반처럼 이대로 2년 반을 보내면 외교와 남북한 관계에서 커다란 어려움에 봉착할 위험이 크다. 하루빨리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를 제대로 구축하고 단순한 자기편의적 정보에 의존한 외교를 넘어서서 실용적이고 현실성 있는 아태 전략 구상에 따른 새로운 외교를 펼쳐야 할 것이다. 세계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 미중일 역량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문재인 정부의 최대 과제가 되어야 하며, 남북 문제는 그 다음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영 논리를 넘어서서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력을 최대한 발굴해서 중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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