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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브리프] 일본의 ‘보수’와 ‘우익’에 대한 심층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자료

조관자 (서울대일본연구소)

2017.03.14

프로젝트: 국내 5대 협력연구기관 공동기획 - 세계 싱크탱크 동향분석
제목: 동북아 정세 변화와 일본사회의 대응 - 일본의 ‘보수’와 ‘우익’에 대한 심층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자료
저자: 조관자 (서울대일본연구소)
No.2017-11


<일본에 우익은 없다? >

세계적으로 반미가 고조된 2000년대 일본에서는 ‘반미 보수’와 ‘넷우익’이 등장했다.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역사수정주의가 세력을 얻으면서, 아시아 침략사와 전후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현상도 짙어졌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2015년 12월 위안부 문제의 한일합의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에는 일본의 ‘우경화’ 행보, 혐한류와 재특회의 배외주의 데모가 연일 보도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정작 일본에서 ‘숨은 우익’은 있어도, 우익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사람은 없다. ‘넷우익’이란 이름도 시민운동 그룹에서 붙인 꼬리표라고 한다. 그 본질은 아사히와 NHK의 편파보도에 항의하는 ‘신보수 여론’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우익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넷우익’(넷토우요쿠)에 미달하는 우스꽝스런 명칭인 ‘넷우’(넷토우요)가 통용되기도 한다.

‘우익’을 자부하는 활동가가 있었다. 1970년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에 감명을 받아 ‘민족파 신우익’을 선언한 스즈키 구니오(鈴木邦男)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1972년 일수회(一水会)라는 우익 단체를 조직한 스즈키는 전학련 학생들의 반전반핵 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 시민운동에 사상적으로 자극 받은 사실을 고백한 적이 있다. 반미의 입장에서 이라크와 북한에 공감하던 스즈키는 결국 ‘좌익같은 우익’이 되었다. 혐한의 헤이트스피치와 넷우익의 배외주의적 언사를 일본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행위로 비판하면서 ‘무늬만 우익’이라는 비난을 산 것이다. “우익은 애국자”라는 신념을 관철하던 스즈키는 2015년 8월에 ‘탈우익 선언’을 발표한다. 기무라 미츠히로(木村三浩)가 대표로 있는 일수회도 이미 ‘독자활동’을 선언한 상태였다.

한국에서 우익으로 불리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 慎太郎)도 2010년의 한 인터뷰에서 “일본의 우익은 벌써 소멸했다”고 말했다. “가두선전차의 폭력단은 있어도, 우익은 없다”는 말이다. 이시하라는 자민당의 친미적 태도에 불만을 품고 탈당한 후, 1999년부터 도쿄도지사로 연임 3번이나 당선된 거물이다. 거침없이 당당한 그가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감추려고 꼼수를 부릴 까닭이 없다. 그에게 ‘우익’이란 섬뜩한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건전한 내셔널리스트’를 의미하는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가 죽은 후 일본에는 더 이상 우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시마는 누구인가.

<우익의 ‘자주적 저항 정신’>

심미주의 작가로 유명한 미시마는 황도파(皇道派) 사무라이의 이념을 퍼포먼스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연기해냈다. 황도파란 1936년의 2.26사건, 즉 부패한 관료 정치를 청산하고 천황 친정의 국가 개혁을 실현하고자 쿠데타를 일으켰던 청년장교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우국충정’은 천황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국가개조론’으로 유명한 우익혁명가 기타 잇키(北一輝)도 실제 사건과 무관했지만, 배후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 2.26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군부 파시즘의 길이 열리게 된다.

1930년대 황도파 청년들이 당대 관료 정치를 부정한 것처럼, 미시마도 전후의 상징천황제와 전후민주주의를 앞세운 관료 및 지식인들을 불신했다. 그는 일본의 주체적 전통을 상실한 채, 미국의 전리품으로 전락한 전후일본에서 자위대 청년들의 봉기를 촉구했다. 자위대원들의 냉랭한 야유 속에서 미시마는 ‘할복’이라는 ‘건전한 테러’를 감행한다. 이시하라는 미시마의 죽음 이후 일본에 건전한 테러리즘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건전한 내셔널리즘도 없다고 강변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우익과 보수를 혼용하지만, 일본에서 양자의 의미는 명백히 다르다. 보수는 미일동맹의 현실적 효용가치를 수긍함으로써 국익을 추구한다. 요시다 시게루-이케다 하야토-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는 관료 정치세력의 ‘경무장 경제국가’ 노선이 보수 원류의 흐름이다. 미시마와 이시하라는 보수 원류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우익은 전후민주주의의 가치와 미일동맹, 즉 패전으로 주어진 외압적인 국가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전복자다. 그들에게 우익이란 온전한 일본의 가치(민족문화)를 스스로 방위하는 자주 정신의 소지자인 셈이다. 따라서 ‘우익이 없다’는 말은 일본의 현실에 대한 ‘자학적’인 자기 부정이 된다.

우익의 현실 부정은 좌익의 혁명 충동과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전후 일본에서 좌익의 반미(반제) 민족주의와 아시아 민족해방론 (민족통일전선론)은 전전 우익의 반미성전 및 동아연맹운동과도 연결되는 지점을 갖는다. 비타협적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측면에서 그들의 사상은 닮은꼴을 취한다. 그러나 평화국가의 정체성이 관철되던 일본에서 우익은 ‘전범’과 ‘테러범’의 폭력적 이미지를 쉽게 벗어내지 못했다.

<우익에 대한 트라우마와 신보수 선언>

1955년 공산당이 그동안의 폭력혁명 노선을 철회하고 사회당과 좌파 연합을 이루면서, 보수연합도 이루어졌다. 그동안 ‘좌익과 우익’의 대립 구도는 의회제 민주주의 틀 안에서 ‘보수와 진보(혁신)’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현실 타협을 비판한 신좌익이 출현하여 1970년대까지 사회운동을 주도했지만, 고도성장 사회에서 계급혁명의 패러다임은 실질적으로 와해된 셈이다.

1957년 전시기의 혁신관료로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내각 총리로 등용되자, 전후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 국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1959년과 1960년의 안보투쟁에서 시민들은 전범 출신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파시스트, 군국주의’로 비판하는 학생운동에 공감을 표명했다. 기시는 안보투쟁세력의 진압을 위해 ‘정치 폭력단’을 고용한 파시스트로 알려졌다. 하지만 기시를 외무대신에 등용하고 그에게 정권을 이양한 정치가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대미자주정책을 취하고자 했던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이었다. 기시 자신도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을 통해 대등한 미일관계에 근접하려는 내셔널리스트였다.

한편, 1960년과 1961년에 연달아 일어난 17세 우익 소년들의 테러사건은 우익 정서가 뿜어내는 섬뜩한 폭력성을 각인시켰다. 특히 1961년 시마나카(嶋中) 사건은 『中央公論』(1960.12)에 천황가를 처형하는 ‘혁명 환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단편 소설 『풍류몽담(風流夢譚)』을 게재한 것이 표적이 되었다. 당시 우익의 반대급부에는 천황제 타도와 폭력혁명을 꿈꾸는 좌익이 있었다. 신좌익은 전후일본의 평화가 제국주의 폭력을 감춘 기만적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했다. 신좌익의 비판적 순수성에 대한 공감은 1972년 아사마 산장사건으로 상징되는 학생운동의 내부폭력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로써 1970년대 풍요로운 일본 사회에서 좌우 양익의 폭력은 철저하게 외면 받게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풍요와 안전 신화가 무너지고 경기침체가 장기화되자, ‘강한 국가’에 대한 욕구가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아베 정권 하에서 ‘우익 성향’의 소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정치가가 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익’이란 낙인을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우익’이란 용어에는 여전히 전후 도쿄재판에서 심판받은 ‘전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도쿄재판 사관’을 공공연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제국주의 만행을 감춘 미국식 민주주의의 불공정한 패러다임에서 붙여진 ‘우익’ 꼬리표를 폐기하고, ‘친미 보수’를 맹렬히 비판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새로운 국가 변혁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반미 보수’와 ‘신보수’가 대두했다. 그들의 출판물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고, 이와나미와 아사히의 신용은 상대적으로 추락했다. 반미적 성향의 신보수주의는 대미종속으로 이어진 전후일본의 탈각을 외친다. 중국의 군사대국화를 우려한 아베 정권은 전후레짐의 탈각을 표방하면서도 현실적 안보 이익을 추구하며 미일동맹을 강화했다. 반미를 비판하는 ‘친미보수’의 목소리도 다시 커졌다. 그러나 ‘반미보수’를 견지하는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아베와 넷우익의 정치적 결탁을 비판한다. 넷우익에게 역사수정주의를 주입한 장본인이 그 후예들과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이다.

<‘전략적 친미’를 부정하는 ‘반미보수’>

1995년 이후 반미보수의 발흥은 정치인, 지식인, 문화인을 중심으로 한 우익단체와 서브컬쳐의 대중문화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 선전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과거 일본공산당원(藤岡信勝) 또는 신좌익 학생운동가(西部邁) 출신이거나 혹은 리버럴 좌파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고바야시는 1996년까지 부락민 차별문제, 옴진리교 사건, 에이즈약물피해(HIV) 사건과 같은 사회문제를 비평하던 만화가로 스스로 ‘사요쿠’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좌우 대립이 형해화한 조건에서 반미 민족주의가 좌우파의 목소리를 모두 흡수하는 흐름을 형성한다. 신좌익과 함께 퇴각했던 신우익도 1990년대에 부활하여 ‘반미보수’ 의 진영 확대에 기여한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좌파 진영과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일본이 “종속 내셔널리즘” 으로부터 탈각할 것을 촉구해 왔다. 신우익과 반미보수가 그러한 좌파의 목소리를 거꾸로 흡수한 채 대중화 실천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셈이다.

2000년대 일본의 사상지형에서 가장 특기할 사항은 ‘전략적 친미’를 철저히 부정하는 ‘반미보수’의 등장과 ‘민족파 우익’의 부활이다. 고바야시는 ‘새역모’의 니시오 간지를 “미국에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ポチ保守)로 야유하며 ‘친미보수’와의 대립각을 세웠다. 고바야시와 함께 새역모를 탈퇴한 니시베 스스무(西部邁, 전 동경대 교수)는 저술과 TV의 토론방송 등을 통한 대중교육에 전념한다. 보수세력의 분열, 보수사상의 대중화 현상에 따라 우파 잡지도 전성기를 맞았다. 반미보수는 기존의 우파 매체인 『산케이 신문』(産経新聞), 『세이론』(正論), 『쇼쿤』(諸君!)이 반미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정책론에서 대미 종속적 태도를 취한다고 비판한다.매체의 자기검열로부터 자유롭게 ‘전략적 친미’를 비판하고 반미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고바야시는 『와시즘』(わしずむ)을 발행하고 니시베는 『효겐샤』(表現者)라는 잡지를 주관한다. 1972년에 탄생한 일수회는 ‘전후체제 타파’를 강령적 목표로 삼고서 기관지 『레콘키스타』(レコンキスタ; reconquista; 재정복)를 발행하고 대중 토론도 활발하게 조직하고 있다.

새로운 반미보수는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 미국을 괴물(鬼畜)로 야유하며 사담 후세인을 응원했다. 일수회는 후세인의 추도회까지 열었다. 이들 반미론자들은 미국이 규정한 ‘악의 축’을 민족운동의 관점에서 본다. 일수회의 최고 고문이자 평론가로 활동하는 스즈키 구니오는 2008년 4월에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의 ‘반미 적개심’과 일본의 ‘반미 감정’과의 온도차를 비교하는 글을 쓴 적도 있다. 산케이신문 기자 출신의 다카야마 마사유키(高山正之)는 사담 후세인을 이라크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칼럼을 저술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제국주의 문명 이념으로 비판하고 일본의 전후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미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이라크와 북한의 정치적 실정이나 인권의 실태 등은 관심 밖의 일이다.

다국적군의 이라크 점령에 대한 비판은 일본의 ‘점령기’ 비판으로 이어지고, 미국의 ‘아시아 봉쇄와 침략’의 역사를 입증하는 구실로 활용되었다. 반미 자주론자들의 생각에 ‘미국식 민주주의와 정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결정하고 후세인 정권을 ‘악의 축’으로 몰아서 이라크를 점령하려는 위선적 폭력이다. 고바야시는 “미국은 일미전쟁을 모델로 이라크전쟁을 수행했다”고 진단한다. 『전쟁론』 2권과 3권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아프리카 침탈을 강조하고 백인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문명론을 비판함으로써 승자의 사관인 ‘동경재판사관’의 부당성에 대한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만화는 ‘아시아의 공영과 해방’을 명분으로 삼았던 ‘대미성전’에 대한 일본인의 기억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좌파 지식인의 고바야시 비판은 수그러졌고 고바야시와 ‘친미보수’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2003년 11월의 TV 심야 토론 프로그램(朝まで生テレビ!)에서 고바야시는 스스로 비판했던 좌파(사요쿠)의 논진에 배석된 적도 있다.

아직 일본과 중국의 대립이 심각하지 않던 2009년 무렵까지 미일동맹의 탈각은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전제하고 있었다. ‘친미 재무장’에 반대하는 노선은 미국 주도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전통적인 ‘중립 평화노선’과 맥락을 공유한다. 외무성의 국제정보국장과 방위대학교수를 역임했던 마고사키 우케루(孫崎享)는 미일동맹 탈피와 친중 우호협력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마고사키는 미국의 이라크전쟁의 실패를 지적하며 일본의 미국 추종과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비판하는 한편, 북한을 글로벌 경제에 포섭하는 전략적 사고 전환으로 일본의 안보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센카쿠 분쟁 이후에도 마고사키는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강화하고 영토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치적 대립을 회피할 것을 거듭 주장한다. 미일동맹은 중국의 군사대국화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무효하며,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축만이 일본의 국익에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실질적인 군사적 불균형과 긴장감 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일본의 자주방위론 확산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니시베는 2007년에 “당연한 이야기를 해야지 않나”라는 부제로 『핵무장론』을 출판한다. 북한의 핵개발이 보도된 2006년 1월 이후 자민당에서 핵무장 문제를 정책적 의제의 하나로 거론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상황이었다. 미일동맹을 벗어나 일본의 독립을 보장할 최선의 자위는 핵무장이라는 생각은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다. 2010년부터 ‘국방론’을 제기한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3.11 이후부터 ‘핵(원자력)발전 없는 핵무장’을 주장한다. 『국방론』의 마지막장 ‘원전과 국방’론에서 고바야시는 미국이 이식시킨 핵발전소야말로 국토방위의 최대 불안 요소며, 미국은 일본의 핵무장을 억제시킨 세력이라고 비판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개발로 고립된 선례가 없으니 국제사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중국과 북한이 핵병기로 일본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핵무장은 독립국의 당연한 국방의 권리라는 주장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좌파의 반미론과 공감대를 형성했던 고바야시는 중국 부상 속에서 ‘핵무장 중립노선’으로 귀결했고, ‘전략적 친미’에도 반대하여 『탈원전론』(2012)과 『반TPP론』(2012)을 펼쳤다.

<반미와 아시아주의의 딜레마>

일본 국민의 과반수는 방위력 강화의 필요성을 느낀다. 2014년 당시, 자위대의 국군화와 집단적 방위권의 행사에 찬성하는 사람은 3할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개발이 확실시되고 중국이 핵무장한 현실에서 영토분쟁까지 분출한 마당에, 러시아의 패권주의까지 대두하였기 때문에 군사적 비대칭성을 해소하려는 일본의 국가적 의지는 오히려 절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핵무장을 전제하는 자주방위론자들은 아베 정권의 집단적 방위론과 헌법개정이 미국의 세계 방위 전략에 협력한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취했다. 결국, 향후 일본의 선택은 미일동맹을 전제한 집단적 방위체제인가, 미일동맹을 부정하고 일본 자신의 핵무장을 전제한 독자적 방위체제인가의 문제로 좁혀질 가능성이 높다. 2010년 이후 현재적 상황에서는 미국을 배제하든 혹은 포함하든, 동아시아의 역사적 화해를 바탕으로 일본의 평화적 경무장이 유지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2015년 집단적 자위권의 법제화는 현 상황에서 차선의 대책이라 할 수 있다.

전전의 실패한 아시아주의와 전후에 부활한 아시아주의는 언제나 같은 사상적 출발점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010년 이후 아시아주의는 각국의 민족주의에 소환되었고, 국가적 갈등 속에 파묻힌 상태가 되었다. 아시아주의의 궁극적 토대는 서구적 근대화에 저항한 자민족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자민족의 생존과 자존감을 옹호하려는 ‘사상적 공통성’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민족 중심의 ‘독립’ 환상이 ‘반미 연대’로 뭉쳤다가 시세의 바람을 맞고 분열한 것이 아닌가. 자민족 중심의 생존 감각에서 볼 때 ‘반미’는 ‘반일’, ‘반중’, ‘반한’으로도 전변할 수 있다. 본디 동아시아 각국의 ‘반미’는 자국 내셔널리즘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지만, 미국의 존재는 동아시아의 질서 유지에도 일본의 우경화 견제에도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렇기 때문에 핵무장을 전제한 반미 자주방위론의 대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여론 장악력은 아직 미약한 형편이다.

2016년 7월 11일 참의원 선거 결과, 아베정권은 개헌파 의원을 3분의 2 이상 확보하여 개헌 발의 조건을 충족시켰다. 헌법개정 논의는 이제 활발해질 예정이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일본국민의 과반수는 아직까지 평화헌법의 개정에 찬성하지 않는 것으로 나왔다. 일본의 헌법개정은 어디까지나 국민투표로 결정된다. 그러나 한국 언론들이 일본을 “전쟁가능한 나라”로 표현하고 “우경화하는 나라”로 단정한다면, 일본 국민 스스로가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의 힘을 입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과연 EU국가들이 브렉시트 투표결과를 받아들이고 혼란을 진정시키며 영국에 협력한 것처럼, 한국과 중국은 일본을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협력할 수 있을까? 영국인들은 경제적 소외와 이민 정책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EU탈퇴’를 가결시켰다고 한다. 일본의 헌법개정을 원치 않는다면, 일본국민이 이웃에 대한 불신과 미움으로 ‘아시아와 등지기’를 결행하지 않도록 동아시아인 모두가 노력해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 역사적 불행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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