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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데이터 “‘정부’를 뛰어넘는 21세기의 거버넌스는?”

서용석

2017.05.22

지난 4월 7일 여시재에서는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미국 하와이대학의 Jim Dator 명예교수를 초청해 21세기를 위한 거버넌스 디자인(Designing Governance for the 21st Century)과 한국경제의 미래: 지속 성장 또는 보존사회? (Futures of the Korean Economy: Continued Growth or Conserver Society?)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진행하였다. 이번 강연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김경동 교수와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조윤제 교수가 지정 토론자로 참석하였다.

Jim Dator교수는 미국의 1세대 미래학자이자 정치학자로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1960년대부터 미래학을 강의해 왔다. 1983년부터 2년 간 세계미래학연맹(World Future Studies Federation) 의장을 역임했으며, 1977년에는 엘빈 토플러와 공동으로 대안미래연구소(Institute for Alternative Future)를 설립하기도 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Dator교수는 세계 여러 정부를 대상를 강연과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다. 이번 Dator교수의 초청 강연은 ‘지속가능한 신문명’ 탐색이라는 여시재의 연구와 관련해 세계적인 미래학자의 혜안과 통찰을 얻고자 하는 취지에서 진행되었다.

Dator 교수의 주요 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1세기를 위한 거버넌스 디자인

현재 우리가 속해있거나 사용하고 있는 제도나 조직들은 모두 인류가 발명한 사회적 발명품이다. 지난 수 세기간 가족, 교육, 기업, 종교 등 거의 모든 사회적 발명품의 형태와 실체가 바뀌었으나 정부만 이러한 변화에서 빗겨나 있다. 현재 ‘정부’만큼 진부한 사회적 발명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정부와 거버넌스 설계를 고민할 때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정부는 18세기 말에 고안된 것이다. 18세기 말에 정부가 설계될 때는 당시의 낮은 교육 수준과 낙후된 통신 및 교통망의 한계가 반영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와 ‘대의제 정부’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새롭게 창안해 낸 것이다. 그리고 합의가 가능하지 않을 때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도 사용했던 것이다. 결국 ‘대의제’와 ‘다수결 원칙’은 당시의 기술과 사상에 기반 한 많은 위대한 사회적 발명품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문제는 18세기 말에 고안된 사회적 발명품을 아직도 지구상의 거의 모든 정부가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새로운 정부 설계를 고민할 때도 18세기말의 기술과 사상에 기반 해 만들어졌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정부 설계에 사용된 기술들은 산업혁명 이전의 기술들이었으며, 세계관은 뉴턴역학에서 파생된 기계론적 세계관과 계몽주의에서 파생된 합리주의였다. 이후 다윈, 프로이트, 하이젠베르크, 푸코, 달리의 새로운 사상들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뉴턴의 구상은 여전히 현시대의 정부 설계와 거버넌스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거버넌스에 직접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다. 오늘날 대중들은 매우 영리하며,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의 정부 형태는 대중들의 효과적인 참여가 어렵고, 대중들이 원하는 정책들을 반영하기 어려워 쉽게 좌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데 ICT가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기술들이 공식적인 거버넌스에서는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ICT를 이용한 직접민주주의는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전자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 시스템과 연계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시민들은 대리인 없이 자신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가장 잘 알고 관심 있는 정책 사안에 직접 투표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든지 새로운 대표자를 뽑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는 직접민주주의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부, 기업, 언론 및 그 밖의 모든 것들을 포함하여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결정에 대해 효과적인 참여와 함께 ‘직접 행정’과 ‘직접 판결’도 필요로 한다.

사실, 공식적인 지배구조가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즉, ‘자치적 지배구조(self-organization)’도 가능할 수 있다. 복잡계 이론은 ‘자치적 지배구조’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이를 잘만 설계한다면 공식적인 지배구조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911 테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치적 지배구조’에 대한 회의를 가져오게 했다. 심지어 ‘민주주의’조차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유’보다는 ‘안전’을 더 갈구하기도 한다.

자유와 질서의 조화는 항상 거버넌스 디자인의 큰 도전이었다. 이는 개인과 집단 간의 이해를 어떻게 균형 있게 조정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거버넌스 설계는 서구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문화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거버넌스 디자인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어떤 행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 할 것인가, 또는 구조화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한다. 올바른 행동을 위한 의지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행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구조는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은 행동’을 원하지만 ‘옳은 행동’을 방해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인 요인 때문에 ‘옳은 행동’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ICT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정보는 장소나 위치에 기반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장소나 위치 기반에서 벗어나 언제 어느 곳에서나 정부의 행정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과 세계관은 새로운 법과 지배 구조를 창조하고, 파괴하고, 또 재창조해 왔다. 과거 문자와 활자 인쇄술의 발명이 그랬다. 문자의 발명은 구전사회의 여러 관습들을 파괴하고, 전문적인 변호사와 판사, 그리고 판례에 의존하는 판결시스템을 창조했다. 이후 인쇄기는 지역법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산업국가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으며, 합리적이고 예측가능하며 획일적인 국가 법률과 헌법을 수립을 도왔다.

새로운 거버넌스 설계를 위해서는 ‘무엇이 일어날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무엇이 가능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다양한 세계관과 첨단 기술들을 활용한 정부와 거버넌스 체계를 디자인해야 한다. 현재 지구상의 모든 정부와 거버넌스 설계는 서구의 구시대적인 민족국가 시스템과 정치 사상에 기반해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도 산업혁명 이전의 기술적 한계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거버넌스 디자인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21세기와의 기술과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거버넌스 설계가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한국경제의 미래: 지속 성장 또는 보존사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이 ‘경제성장’이라는 미래를 상정하고 달려왔다. 그 중에서 한국은 가장 성공한 국가 중의 하나이다. 한국은 농업에만 의존하던 경제를 빠르게 산업경제와 정보경제로 변화시켰으며, ‘한류’라는 창조적 콘텐츠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는 마치 ‘꿈의 사회’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러한 진보는 한국의 미래를 ‘상징과 미학적 경험의 꿈의 사회 (Dream Society of Icons and Aesthetic Experience)’로 변모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한국은 최초의 ‘보존사회 (conserver society)’가 될 수도 있다. 과거 50년과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경제성장이 아닌 50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성장의 한계, 그리고 계속된 경제성장이라는 허구와 불가능을 바탕으로 한 미래상은 대략 ‘보존사회’ 혹은 ‘절제사회 (disciplined society)’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로마클럽의‘성장의 한계’는 1972년 발간 즉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성장의 한계는 환경오염, 인구폭발, 식량문제, 자원고갈 등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류의 문명은 21세기가 채 끝나기 전에 붕괴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주장은 우파성향의 학자들에 의해 희석되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 몇몇 학자들은 성장의 한계가 제시한 모델과 주장이 옳았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미래에 대한 경고는 정책결정과 관련될 경우 더욱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1970년대 캐나다 국가과학위원회에서 캐나다를 현재의 ‘소비사회’에서 ‘보존사회’로 전환시키기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된 적이 있었다. 당시 몬트리올 대학의 감마(GAMMA)팀은 수 천 명의 학자들 및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캐나다의 보존사회를 설계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북미의 정치경제 세력들, 즉 경제성장만을 추구하고 환경, 자원, 사회적 이슈에는 관심이 없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지난 반세기 간 많은 미래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은 미래는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속적인 성장일 수도, 붕괴일 수도, 보전을 추구하는 사회일 수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변형된 사회일 수도 있다. 향후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것이 바로 ‘위험한 삼위일체(unholy trinity)’의 등장이다. 그 첫 번째는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 시대의 종언이다. 둘째, 불안정한 기후로 인한 식량과 물 부족, 그리고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이다. 셋째, 세계인구의 고령화와 지역별 인구증감의 불균형이다. 여기에 분배 정의를 바탕으로 한 지속가능한 경제가 없는 미래, 국가가 통치력을 상실하는 미래가 더해진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이 모든 요소의 존재를 부정하고 ‘성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위험한 삼위일체가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다면 꿈의사회, 정보사회, 산업사회마저 위태롭게 될 것이다. 어쩌면 농업사회로 회귀할 지도 모른다. 한국은 이제 더 이상 따라할만한 선도 국가가 없다. 과거의 좋은 성적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어떠한 기술적 돌파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지금의 시스템은 붕괴할 것이며, 이를 회복시키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것이다.

Dator 교수의 강연 이후 김경동 교수와 조윤제 교수의 지정 토론이 이어졌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경동 교수는 Dator 교수의 강연과 관련해 여러 부분에서 동의를 표시했다. 특히, 김교수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거버넌스 체계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발전이 없었으며,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다고 진단했다. 대중들은 ‘정치가’라고 하는 그들의 대리인들을 선출하지만, 이들 대리인들이 만들어내는 정책과 제도는 대중들이 원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문제가 현재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대중들이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정책형성과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재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윤제 교수는 Dator 교수가 주장한 ‘보존사회’가 지속가능한 경제사회를 지향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데 동의하면서도, 어떻게 이러한 방향으로 한국의 국민들과 정책 결정자들을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조교수는 “‘보존사회’라는 개념을 실제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성장의 포기’를 포함해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정책 결정자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김경동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약력: 現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前 미국 듀크대학교 초빙교수

조윤제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약력: 前 제21대 주영국대한민국대사관 대사
 前 국제통화기금 경제분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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