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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인사이트] 투키디데스 함정, 킨들버거 함정 그리고 ‘문명충돌론’의 귀환 - 거대 담론의 흐름으로 본 미·중 갈등

차태서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019.09.06

​미 외교협회 회장의 부고장
“덜 자유롭고, 덜 번영하며, 덜 평화로운 세계로”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주도해 건설하고 수호해온 자유세계질서가 침식되고 있다. 전간기(戰間期 · interwar, 1차 세계대전 종결에서 2차 대전 발발 때까지의 시기)의 대혼란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후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이 군사 영역과 경제 영역 모두에서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하고 다자주의적 국제제도를 창설해 구축한 것이 현재까지의 자유주의적 국제체제였다. 이는 미국 자신의 국내 레짐의 이미지에 따라 전 세계를 개혁하려는 시도이자, 스스로 그 체제 내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시스템이었다. 특히 냉전의 종식을 통해 완전히 보편적인 지구 질서로서 공고하게 성장하는 듯 보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 종언론’은 그러한 세계사적 사건 전개를 역사철학의 논리를 빌어 설명한 대표적인 찬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년에 바로 이러한 자유세계질서를 설계하고 구성해온 미국의 주류 외교 엘리트 세력을 대표하는 외교협회(CFR)의 리처드 하스(Richard Haass) 회장이 ‘The Liberal World Order, R.I.P.’라는 글을 발표한 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워싱턴 기득권 집단의 심장부로부터 미국 주도의 패권질서가 종식을 맞이하고 있다는 부고가 발표된 셈이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트럼프 시대 외교정책노선의 대전환이 미국 스스로의 창조물인 자유세계질서의 파괴를 불러오고 있는 것에 대한 한탄이자 경고이다. 특히 트럼프의 일방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인 행보가 모두에게 “덜 자유롭고, 덜 번영하며, 덜 평화로운” 세계를 가져올 것이란 불길한 예언을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2008년 무렵 소위 ‘쌍둥이 위기(지정학적+경제적 패퇴)’ 이후 미국 패권이 급속히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탈 냉전기 일극체제라는 특수 국면이 끝남으로써, 자유세계질서를 떠받칠 미국의 힘과 의지가 점진적으로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 자유국제체제의 위기는 단순히 트럼프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속될 세계사적 국면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현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 미어샤이머 화려한 재조명
“강대국 간 관계는
비극적 갈등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새롭게 (재)등장한 것이 바로 현실주의적 세계질서 담론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미국 일극체제와 ‘지구화’ 구호 속에 은폐되어 있던 국제정치의 ‘진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2014년 러시아의 준동(크림반도 점령과 우크라이나 개입 사태)을 배경으로 작성된 월터 러셀 미드(Walter Russel Mead)의 ‘지정학의 회귀’론과 오랫동안 자유주의 국제정치이론의 강세에 밀려 외로운 광야의 외침 취급을 받았던 공세적 현실주의자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의 『강대국 정치의 비극』 논의가 미중 경쟁의 격화를 맥락으로 화려하게 재조명되고 있는 상황은 이런 국제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를 대변한다.

우선 미드에 따르면, 현재의 국제체제가 여러 지역 패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지정학적 경쟁의 장으로 구성되어가고 있기에, 과거의 현실주의적 세상이 재부상하고 있다. 승리에 도취한 서구는 큰 오판을 했는데, 탈냉전기 구소련을 대신해서 중국이 부상하는 등 각지에서 지역 강대국들이 다시 나타나면서 역사의 진로가 평화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개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정학적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는 지정학의 회귀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역사철학적 예언과는 달리, 역사는 냉전의 종식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금 지정학적 갈등이 고조되는 세상으로 회귀해 버렸다는 것이 미드의 핵심 명제이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고 같은 패턴이 영원 회귀할 뿐이라는 투키디데스적 주장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어샤이머는 2001년 초판이 출판되고 2014년 증보판이 출판된 자신의 주저에서, 무정부 상태라는 극도의 불확실성이 만연한 국제체제 구조에서는 공포와 불안에 처한 개별 강대국이 권력의 최대화(=패권)를 추구하게 되므로, 강대국 간 관계는 계속해서 비극적인 갈등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공격적 현실주의론을 설파한다. 특히 눈부신 경제발전이 지속되면서 베이징은 워싱턴이 걸어왔던 길을 따라 마치 19세기 미국이 서반구를 제패했던 것처럼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할 것으로 예측하는데, 이에 미국이 ‘대중균세(均勢)연합’을 건설하며 대응에 나섬으로써, 중국과 미국 사이에는 지난 냉전과 유사한 심각한 안보 경쟁이 야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한다.

戰間期의 추억: 투키디데스 함정과 킨들버거 함정

한편 현재의 미중관계를 20세기 전반의 대혼란과 대비 속에 파악하는 방식들로 투키디데스 함정과 킨들버거 함정이란 개념들도 유행하고 있다. 이는 국제정치학의 패권 이론 관점에서 현 상황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최근 몇 년 새 하버드의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 교수의 작업에 의해 세계적으로 널리 논의하게 된 ‘투키디데스의 함정’ 개념은 신흥 강국이 급성장하여 기존 패권 국가의 지위를 위협할 때 생기는 대결 국면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 시절 아테네(부상국)와 스파르타(패권국)의 전쟁 원인을 설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인 역사가 투키디데스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특히 기성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이 서로를 의심하고 공포를 느끼는 국면에 주목한다. 20세기 전반 기성 패권국 영국과, 2차 산업혁명과 통일의 성과를 업은 독일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과 불안이 결국 양차 대전으로 이어졌던 상황이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반면, ‘킨들버거 함정’ 개념은 찰스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 MIT 교수가 고전적 패권안정론 저술인 『대공황의 세계 1929~1939』에서 기성 패권국의 ‘역량’ 부족과 신흥 패권 후보국 미국의 ‘의지’ 부족이 겹쳐 대공황이 발생했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전간기에 이미 물질적 역량에 있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고립주의에 빠져 국제적 리더로서 글로벌 공공재 제공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구 경제 시스템이 붕괴되고 대불황과 대학살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이를 현재 상황에 대입해 보자면, 빠르게 세계 공공재 제공을 거부해가는 트럼프 시대 미국을 대신해 과연 중국이 향후 세계의 리더 국가로서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만일 미국이 계속해서 후퇴해가는 상황에서 중국이 패권 안정 역할의 계승에 실패하는 ‘전 지구적 대공위(international interregnum, 리더 국가의 부재)’ 조건이 구성된다면, 또다시 전간기의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언이다.

중국이 빨리 성장해도 느리게 성장해도
위기에 빠지게 되는 딜레마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위의 두 함정을 종합해 볼 경우, 중국이 너무 빠르게 성장해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면 투키디데스 함정의 위험이 고조되고, 반대로 중국이 느리게 성장하며 내향적 태세를 유지할 경우 킨들버거의 함정 문제가 부각되는 딜레마적 상황에 우리가 처해있다는 점이다.

헌팅턴의 부활: 문명의 충돌 테제 재부상

한편, 트럼프 행정부 하 문명 담론의 부상도 미중관계의 예측과 맞물려 귀추가 주목되는 중요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2017년 7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행한 연설에서 트럼프는 서구 문명의 수호라는 주제에 대해서 논하는데, 얼핏 듣기에 이는 보편주의를 재천명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트럼프가 호명하는 ‘우리의 문명’은 자유주의 같은 보편가치에 기반한 개방적 코스모폴리탄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 기독교도들만의 유산을 수호하는 역사적 공동체로서 폐쇄적인 서구 문명 옹호론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문명 대 야만’이라는 구도 자체는 미국 외교의 예외주의적 담론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전통적 수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명’은 2000년대 초 대테러 전쟁기에 부시 행정부도 즐겨 사용하던 개념으로, 이는 (물론 내재적으로 기독교적 함의가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공식적으로 ‘야만’으로 규정된 테러리즘에 맞서 자유와 번영을 수호하는 보편가치로서의 문명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문명 표준(standard of civilization)’과 같은 용법에서 잘 나타나는 단수적 의미에서의 문명론(singular understanding of civilization)이 본래 예외주의 담론에서 통용되는 문명의 의미였다. 이런 맥락에서 부시 정부는 이라크, 아프간 전쟁 등을 수행하면서 기독교 문명 대 이슬람 문명이라는 구도가 수립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노력하였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들어와 나타난 문명 담론은 이러한 단수적-보편주의적 용법이 아니라,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식의 복수적 문명론 혹은 서구 특수주의(유럽 문명도 8개 문명 중 하나일 뿐이라는 설명) 맥락 하의 문명론과 상통한다. 일찍이 헌팅턴이 『문명충돌론』과 『우리는 누구인가?』 등의 저술에서 천명했던, 그러나 단극체제의 시대 동안 보편주의적/승리주의적 거대 서사인 ‘역사 종언론’에 눌려서 주변화되었던 특수주의적이고 비관주의적인 문명 담론이 화려하게 재부상한 셈이다. 더 이상 미국적 신조는 보편가치로서 전세계에 전파될 수 있는 잠재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대신 특수주의적인 서구 문명의 결속을 통해 비서구 문명과의 대결을 준비하는 것이 변화한 정체성과 대전략의 화두가 된다.

볼턴 “미중 갈등엔
문명충돌적 요소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중국과의 문명충돌론에 대한 언급이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점증하는 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본래 탈냉전 시대 미국의 대중 전략은 클린턴 행정부의 ‘관여와 확장(engagement and enlargement)’ 정책이 상징하듯 예외주의론에 기반하여 중국을 미국 중심의 자유세계질서에 동화시키는 보편주의 접근법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개입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고 단언한다. 2001년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키는 등, 미국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후원하며 공산정권의 개혁과 자유화를 유도했지만, 중국은 그와 정반대로 개방무역질서의 허점만을 파고들며 미국의 국력을 약화하는 수정주의 대국으로 성장해버렸다는 것이 현 정부의 상황 진단이다. 따라서 예외주의적 자유 패권전략 대신에 일종의 대안담론으로 부상한 것이 미국과 중국 간의 문명충돌 담론이다. “소련과의 전쟁이 서구 문명권 내부에서의 싸움이었다면, 중국과의 전쟁은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차원이 다른 문명권과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규정한 카이론 스키너(Kiron Skinner)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의 2019년 5월 발언과, “지금의 미중 갈등은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 볼턴 보좌관의 2019년 7월 연설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보편성에 기반을 두고 상대방과의 동질화를 추구하는 예외주의 담론과 달리 상대에 대한 배타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헌팅턴류의 세계관이 만일 워싱턴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고, 베이징 또한 ‘중국몽’과 같은 특수주의적 서사로 지속 대응할 경우, 헌팅턴이 말한 문명충돌의 예언이 자기실현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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