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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재 인사이트 / 기후변화] 끊임없이 비상벨 울리는 미국과 중국 모델, 진보·보수 모두 자신들만의 교과서 버릴 때

안병진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

2019.12.17

시사 주간 타임지의 ‘2019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스웨덴
출신의 16세 소녀이자 환경 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

지난 9월 24일 만 16세의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는 유엔 기후정상회의에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을 앉혀놓고 “당신들은 공허한 말로 내 꿈과 내 어린 시절을 빼앗고 있다”고 했다. 소녀는 그냥 담담하게 말한 것이 아니라 절규하듯이 “대량 절멸이 시작되고 있다”고 소리쳤다. 진심으로 화내고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다. 울림은 컸다. 그러나 그때뿐, 그 이후에도 행동은 없었다.

지금 세계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기후 재앙에 대한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북극이나 북서 미국,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버린 사진, 플라스틱을 먹고 죽은 고래 사진 같은 것들이 세계로 퍼졌다. 바다 수위가 더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유엔과 교황청,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미 기후 재앙에 들어섰다”고 말하지만 그뿐이다. 나와 내 이웃과 내 도시와 내 나라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멈추지 못한다. 본질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다. 과연 어떻게 이 거대한 간극을 좁혀 행동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수많은 툰베리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들에게 어떻게 하면 온전히 지구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인가?

(재)여시재는 기후변화와 환경, 지속가능성 문제를 핵심 대상으로 삼아 지속적으로 연구와 토론을 진행해왔다. 여시재와 파트너십을 갖고 이 문제를 연구해온 경희대 안병진 교수의 글을 세 차례에 나눠 싣는다.

1. 미 국방부의 충격적 보고서와 ‘일상’이 된 ‘기후재앙 보고서’들
2. 미국과 중국은 왜 움직이지 않는가
3. 앞으로 10년, 퀀텀 리더십으로 가자

나는 ‘툰베리 효과’가 불편하다

연말 한국 정치의 최대 화두는 선거제 개혁이다. 한국 정치의 원형인 미국의 연말 최대 이슈는 대통령 탄핵이다. 그리고 서구의 대안이고자 욕망하는 중국의 올해 중요 쟁점 중 하나는 홍콩이다. 정치개혁이라는 큰 주제로 수렴되는 이 세 이슈는 저마다 다른 맥락에서 진행되는 논쟁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깔려있다. 바로 청년 세대가 중요한 주체로 부상한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에서 청년의 의회 다수 진출이란 과제는 이제 주류 사회의 담론이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주요 정당의 청년비례로 최소 4인 이상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주변에서 철없는 이상주의자라고 엄청 욕을 먹은 바 있다. 하지만 이제 4석을 얘기하면 기득권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격세지감이다.

오카시오 코르테즈 美 하원의원

미국에서는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오카시오 코르테즈 하원의원이 탄핵, 그린 뉴딜 등 민주당 내 어젠다 설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만약 대통령 출마 나이 제한(35세)이 없었다면 코르테즈는 지금쯤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2014년 홍콩 우산혁명의 주역인 ‘조슈아 웡 세대’도 이제 시민정치운동에서 제도권 정치로 대거 진입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로서는 미래를 쟁취하고자 하는 뉴 밀레니얼 세대의 도전이라는 전례 없는 과제에 직면한 셈이다. 잠자는 거인이었던 청년세대의 깨어남이란 점만 놓고 보면 2020년은 2019년 보다 더 역동적인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만약 시야를 좀 더 넓힌다면 이야기 구조가 확 달라진다. 얼마 전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이제 툰베리는 모두가 칭송하는 시대정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그레타 효과’라는 현상의 전개 방식이 다소 불편하다. 왜냐하면 전 세계의 열렬한 찬사가 반대로 툰베리의 처절하고 급진적 호소의 진정한 의미를 잊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툰베리의 진정한 기여는 단지 생태 이슈의 쟁점화를 넘어 진정한 의미의 ‘급진주의(radical)’ 정치를 복원했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급진주의는 좌파적이란 의미가 아니다. 래디칼의 어원은 사물의 근본 뿌리를 말한다.

Radical
= 거대하고 근원적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거나 표현하는
= 언어를 구성하는 형태소 중 그 말의 의미적 중핵을 이루는 어간 부분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 재구성’
향후 10년은 非常의 시기

툰베리의 시각에서 과연 현 시스템에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편입되면 건전성을 되돌릴 수 있을까? ‘기후 위기 도래’와 ‘자본주의 재구성’이라는 두 거대한 지각판의 이동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개혁들은 단기적으로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불판 자체를 갈기에는 너무 작은 몸짓이 아닐 수 없다. 급진주의의 강점은 우리의 상상력과 실천의 지평을 넓힌다는 점에 있다. 물론 그 상상력의 실현 과정은 냉혹한 현실주의와 결합되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이 에세이는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 재구성이 모든 것을 타격할 향후 10년이라는 비상(非常)의 시기를 고려한 ‘큰 정치(big politics)’의 담론을 제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가 불가능을 사고할 때 가능성의 어젠다도 부단히 경계선을 넓혀갈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성급히 답을 쓰기보다는 일단 머릿속을 스쳐가는 혼란스러운 질문들을 옮겨보고자 한다.

Capitalism, TIME FOR A RESET



= 영국의 중도우파 성향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 9월 18일자 1면 전체를 ‘Capitalism, TIME FOR A RESET’이라는 다섯 개의 단어로 채웠다. FT 편집장은 “자유 기업 자본주의는 지난 50년간 빈곤을 없애고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시켰다”며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기업이 주주가치 극대화에만 집중하는 것은 충분치 않게 됐으며 자유 기업 자본주의의 장기적 건전성을 지키기 위해 이윤을 고객과 종업원에게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고 기획 취지를 설명했다.

미 대선과 그린뉴딜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에는 희망의 사고가 더 적절한 톤일지 모르지만 툰베리의 비장한 정서를 따라 다음의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내년 미국에서 엘리자베스 워렌 같은 그린뉴딜주의자들이 집권하면 기후 재앙은 극복될 수 있을까? 오늘날 미국 정치 지형에서 이 어젠다는 어느 지점까지 실현이 가능할 수 있을까? 지금 미국은 제도권 내 상대 정치세력을 문명의 적으로 규정하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 영구적 캠페인의 나라에서 초당적 합의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설령 합의가 이루어져 전 지구적 그린 뉴딜과 그린 마샬이 이루어지면 생태적 문명으로 대전환이 이루어지는 걸까?

여전히 제국을 꿈꾸는 중국
생태적 전환이 가능하기는 한가?

홍콩 사태를 ‘해결’하고 난 중국 공산당은 과연 시민들의 다양한 참여의 온도를 높이면서 생태적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미국식 영구적 선거 캠페인은 없지만 아직 성장주의 신화와 제국에 대한 중국몽이 강고한 현실에서 생태적 전환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각자의 취약점을 외부로 투영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은 과연 새로운 리더십이 들어서면 다시 협력할 수 있을까? 오히려 마치 겨울 재앙이 다가오는 데도 협력보다는 진영 간 투쟁을 선택했던 왕좌의 게임 드라마처럼 미국과 중국은 향후 10년간 피투성이 게임을 지속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혹시 거대한 지구적 기후 위기가 눈앞의 현실이 된 이후에야 국내외적인 협력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분기점을 넘어선 것은 아닐까?

‘미국 자본 헤게모니 영속화’

‘기후 마오 시스템’

지금 미국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정치학의 진지한 학문적 과제로 전환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후 재앙과 불평등이 바꾸어놓을 미래 정치 모델에 대한 백가쟁명의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작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기후 리바이어던(Climate Leviathan)』이란 저서에서 지오프 만(Geoff Mann)과 조엘 웨인라이트(Joel Wainwright) 교수는 이제 더 이상 정상적 절차의 자유주의 정치는 작동하지 않는 비상 정치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전망한다. 그들이 과거 홉스의 리바이어던(구약성서에 나오는 괴물로서 절대주권의 국가를 의미)이란 개념을 불러오는 이유는 마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내전 상황에서 절대적 권한의 필요성을 옹호했던 비상 시대가 기후 파국으로 다시 도래하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주권은 정상 규칙의 예외와 비상조치를 판단, 실행할 수 있는 강력한 권능을 부여받는다. 다만 홉스의 시대와의 차이는 이 비상권력이 민족국가가 아니라 지구적 차원의 제국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이 디스토피아의 미래에 가능한 시나리오를 4가지로 제시한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미국 리버럴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기후 리바이어던’ 체제이다. 이는 기후 위기를 계기로 미국 자본의 헤게모니를 영속화하는 기업 제국 시나리오이다. 미국 민주당이 집권하면 자본 분파의 힘이 강한 현실을 볼 때 이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좀 더 실행력이 있지만 권위주의 체제로서 저자들은 중국 사회주의가 주도하는 ‘기후 마오(Climate Mao) 체제’의 모델을 제시한다. 중국이 일대일로와 빅 데이터 감시 체제를 통해 꿈꾸는 미래가 아마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 정부처럼 이 기후체제에 저항하는 반동적인 ‘기후괴물(Climate Behemoth, 리바이어던과 함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괴수) 체제’가 한동안 잔존할 가능성도 저자들은 제기한다. 저자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대안적 체제를 ‘기후 X’라 정의한다. 미지의 시나리오라는 의미로, 이는 자본주의와 기존 주권 개념을 넘어선 이상주의의 체제이다. 저자들은 평등(equality), 포괄(inclusion)과 존엄(dignity), 그리고 연대(solidarity)의 가치라는 막연한 방향만 제기할 뿐 구체적 언급을 회피한다.

미국 제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과 중국의 마오쩌둥 전 공산당 주석

미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든 설계도
이제 소프트웨어 수명 다해

이러한 다양한 질문을 던져보고 미래 시나리오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근대 문명을 일으킨 창조적 발명품인 미국과 중국 모델이 지금 완전히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과 중국의 건국의 시조들은 당시에는 탁월한 디자이너였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 소프트웨어의 수명이 다했다. 나는 기존 진보와 보수 진영들이 자신들의 기존 교과서를 버리고 이제 미국과 중국에 대한 새로운 진단을 내릴 때라고 본다.

오늘날 시점에서 보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설계도에는 두 가지 결정적 차원이 배제되었다. 하나는 자본의 인격화에 대한 제어장치 결여이다. 다른 하나는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나 토마스 배리가 오래전 지적하였듯이 정치 지평에서 지구 행성과 미래 주체의 배제이다. 자본에 대해 경계했던 토마스 제퍼슨은 자본을 확장하고자 한 해밀튼에게 사상투쟁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로버트 히에로니무스(Robert Hierionimus)에 따르면 미국 인디언들에게 연방주의라는 영감을 얻었던 제퍼슨은 교묘하게 그 아이디어에서 생태주의와 여성주의를 배제했다(America’s Secret Destiny, 1989). 미국 설계도는 해밀턴과 제퍼슨의 공모 작품이다. 고삐 풀린 자본은 결국 오늘날 카지노 자본주의와 금권정치라는 괴물을 낳았다. 그리고 자연과 미래 주체의 배제에 따른 단기 시야의 정치는 자신이 기거하는 집(지구 행성)을 회복 불가능한 지경까지 파괴해버렸다.

헤겔과 아렌트는 근대 혁명 중에서 미국 혁명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오늘날 시점에서 이 혁명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혁명이다. 이런 미국 모델의 근원적 설계 결함 때문에 존 아리기, 마이크 데이비스 등 적잖은 진보 석학들이 또 다른 근대혁명으로 탄생한 중국 모델에 간절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레닌의 후계자 중국
견제와 균형에 아예 관심 없었다

물론 ‘지혜로운 자’들이 통치(賢能주의)한다고 하는 중국은 여전히 과거에 머무는 미국과 달리 놀랍게도 헌법에 생태문명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걸출한 생태신학자인 존 캅 신부는 중국 지도부의 통찰력과 생태에 대한 열정에 희망을 가진다. 하지만 결국 제대로 된 통찰력은 다양한 가치와 생각들이 역동적으로 갈등하고 합의하는 데에서 나온다. 중국은 레닌의 후계자답게 설계 당시에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장착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그래도 페이스북 등 대기업의 독점 분할이 논의되고 있지만 중국은 국가의 독점적 정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긴 시야의 지혜와 집행력에 빅브라더 시스템이라는 기묘한 결합의 길을 가는 공산당이 지구 행성과 미래 주체를 고려한 국가를 만들지 않을까? 물론 미국보다는 더 생태적 전환에 빨리 갈 수는 있다. 다만 누가 기후 위기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공산당의 자의적 판단과 영구적 독점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문제는 홍콩의 촛불혁명과 미국과의 패권 전쟁을 거치면서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취약점을 더욱 권위주의적 기제로 보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한 번 상상력이 필요하다

미국과 중국의 소프트웨어가 오늘날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다면 우리는 위의 질문들에 이어 몇 가지 골치 아픈 질문을 더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 정치의 원형인 미국 정치 모델이 이제 부단히 버그를 만들어 낸다면 우리는 중장기적으로 어떤 모델을 만들어가야 할까? 매디슨의 대의제 미국과 마오의 현능주의 중국 모델을 넘어서는 정치 모델은 무엇일까? 그들이 시대적 제약 때문에 놓친 미래와 지구 행성에의 책임과 권한이란 범주를 어떻게 정치 모델에 결합시킬 것인가? 현실적으로 총선 이후 집권 진영의 힘이 빠져가는 물리학 법칙 속에서 과연 우리는 향후 10년간 어떤 정치실험을 해야 할까? 오늘날 집권 진영이든 반대 진영이든 기후 파국과 불평등이 포괄적 어젠다로 취급되지 않는 한국 현실에서 향후 다가오는 10년의 이행기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가? 워렌 등 그린뉴딜주의자들이 운 좋게 집권한다면 전 세계는 과연 제2의 뉴딜과 마샬 시대가 올까? 이 뉴딜 시대가 미국 주도의 헤게모니 제국으로 흐른다면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할까? 권위주의적인 기후 제국이 될 중국몽에 대해 우리는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들 간의 상호 기후 봉쇄 노선이 등장한다면 우리의 길은 무엇일까? 신남방 정책은 이 미국과 중국 모델의 오작동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길일까? 기후 파국과 불평등,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기후 제국이 한반도와 아태 차원에 어떠한 새로운 정치, 안보적 상상력을 필요로 할까? 전 세계의 화두처럼 홉스적인 리바이어던(비상정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적 절차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 지긋지긋한 권위주의의 시대가 촛불 혁명이 발생한 한반도에도 다시 부활해야 하는 걸까? 이를 어떻게 헌정 질서 내에 반영해야 할까? 일련의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새로운 질문을 가지고
새로운 현실에 부딪쳐 가야

물론 나는 체계적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기존 문명의 축과 판이 바뀌는 현실에서 2020년은 새로운 현실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을 가지고 가치와 어젠다의 대논쟁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뿐이다. 넥스트 10년을 위한 이 질문들에 대한 실천적 답을 찾아나가지 않는다면 한국에서도 이미 오래전 시작된 공적 지식인의 최종 몰락을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월 말에 게재될 3부의 마지막 글에서는 향후 10년, 넥스트 리더십의 기본 방향을 ‘퀀텀 리더십’이라 정의하려 한다. 다가오는 2020년은 단지 청년의 대거 진출을 넘어 향후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 재구성이 만들어 낼 10년간의 시스템의 전환에도 관심을 더 기울였으면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먹고살기 바빠 여기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시스템 전환은 우리의 삶과 시스템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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