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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기의 설계자들] ‘無’에서 ‘세계 1위 혁신국가’를 창조한 리콴유 - “정치는 생명을 바쳐 하는 것,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황동일 기획위원

2019.09.27

<편집자 주>

대전환기다. 냉전 70년 만에 탈냉전과 미국 단일 패권시대가 왔고, 그 이후 30년 만에 패권 질서 재편의 시기에 들어섰다. 여기에 4차 디지털 기술혁명이 표준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의 권력이동이 가로 세로축으로 교차하면서 세계적 수준에서 격랑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이런 대변동기에 야수의 먹잇감이 되었다. 전장(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되거나 식민지가 되거나 분단이 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미·중 패권 경쟁의 격화로 인해 커져 가는 지정학적 리스크, 강제징용자 문제로 빚어진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와 한·일 갈등 등이 한국이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한다. 새로이 열리는 위기의 징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시대의 성패도 갈릴 것이다. 크게 보고 현명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사에는 전환기적 상황 속에서 국가를 일으켜 세운 거목들이 있다. 여시재는 그들로부터 이 대전환기를 헤쳐나갈 슬기와 지혜를 얻고자 한다. 이번 순서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이다.

<리콴유는>

건국의 아버지이자 싱가포르의 캡틴

말 그대로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이자, ‘아름다운 정원 국가’로 불리는 지금의 싱가포르를 만들어낸 ‘싱가포르의 캡틴’이었다. 1923년 중국 광둥성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해온 한족 객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1935년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 학교인 래플스 인스티튜션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았다. 1946년에 리콴유는 영국으로 건너가 1949년까지 케임브리지대학(Cambridge University)에서 장학생으로 법학을 공부하였고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미들 템플(Middle Temple)에서 1950년까지 수학한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귀국 후 변호사 활동을 하다 1950년대 초, 당시 집배원 및 전화교환수 노조와 영국 식민정부와의 임금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다. 1954년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젊은 지식인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연합한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했다. 인민행동당은 1959년 5월 인민회의 전체 51석 중 43석을 획득하여 집권당이 되었다. 영국령 싱가포르에서 의원들 전체를 직접 투표로 뽑은 첫 선거였다. 리콴유는 이 때 영국령 싱가포르 자치 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일생 동안 네 나라 국가를 부르며 살았다”

리콴유는 2000년에 펴낸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 (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1965 ~ 2000)에서 “나는 일생 동안 네 나라의 국가(國歌)를 부르며 살아야 했다. 영국의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일본의 ‘기미가요', 말레이시아의 ‘나의 조국’, 그리고 싱가포르의 ‘전진하는 싱가포르'이다”라고 자신의 생애를 요약했다. 이는 고스란히 싱가포르의 역사였다.

싱가포르는 원래 해적들의 섬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들어오면서 중국과 인도, 말레이시아 등에서 노동자들이 따라 들어왔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식민지로 떨어졌다가 다시 영국령이 되었다. 리콴유 집권 후 말레이령으로 자진해서 들어갔다가 리콴유가 비말레이계의 단결을 호소했다는 이유로 축출당하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 1965년 독립했다. 독립은 했지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았다.

1965년 독립 당시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500달러 남짓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자원은 물론 시장도, 인재도 없었다. 식수까지 말레이시아에 의존했다. 수익이라곤 중계무역으로 얻는 얼마간의 수입뿐이었다. 국민 10%가 영국 해군기지 관련 사업에 고용되어 있었다. GDP의 23%가 여기서 나왔다. 중국계, 인도계, 말레이계 등 종족과 종교로 나뉘어 사분오열이었다. 무엇보다 국가가 존립하기 위한 역사, 정체성, 상징성이 없었다.

이 나라가 2018년 기준 1인당 GDP 5만 4000달러의 부국으로 올라섰다. 세계 최선두권의 혁신 국가, 청렴국가이면서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최상위권이다. 리콴유와 그의 후계자들이 여러 번의 대전환기를 넘어 오늘의 이 나라를 만들었다.

이웃나라 인도네시아의 전 대통령인 B. J. 하비비는 “지도에서 붉은 한 점에 지나지 않는(little red dot)” 작은 나라라고 묘사한 일이 있다. 리콴유의 아들이자 현 총리인 리셴룽은 2014년 이 말을 받아 “빛나는 붉은 점처럼 반짝이는 국가를 건설했다”고 했다. 리콴유는 2015년 사망할 때까지 ‘붉은 점처럼 반짝이는 싱가포르’에 헌신했다.

<임계순-이광재 대담>

싱가포르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정부와 공무원과 사회서비스 환경을 갖출 수 있었을까? 임계순 한양대 명예교수와 여시재 이광재 원장이 리콴유 리더십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임 교수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중국 근현대사 전문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청나라의 통치술인 팔기주방이 소수가 다수를 통치하는 중요한 제도였음을 세계 역사학계에 최초로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이 논문으로 임 교수는 2001년 최고 권위 인명사전인 ‘마르퀴즈 후스 후’에 올랐다. 한중 수교 전인 1991년 교육부 파견으로 베이징대에서 연구했다. 『청사(淸史)―만주족이 통치한 중국』을 비롯한 여러 연구서를 썼으며 작년엔 『중국의 미래, 싱가포르 모델』을 냈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싱가포르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이 된 리콴유와 싱가포르 앞에는 하나같이 중차대하고, 그만큼 풀기 어려운 당면 과제들이 놓여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싱가포르의 독립과 자주를 어떻게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 리콴유와 집권 인민행동당은 영국이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의 영향권으로부터 분리하여 영국의 영구 식민지화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두 번째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 즉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리콴유가 총리로 취임한 1959년 싱가포르의 실업률은 전체 인구의 13퍼센트에 달했다.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파업과 폭동이 잇달았다. 일자리와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1961년 공업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실행했으나 지지부진했다. 당시 인구 100만 명 규모로는 독립적인 내수시장을 확보하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채산성을 맞추기 힘드니 기업과 자본가들은 투자를 꺼렸고, 이것은 곧 산업 생산 부진과 경제 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자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면서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을 위협하는 체제 문제까지 불거졌다.

특히 1961년 4월에 치러진 입법의회 보궐선거에서 인민행동당 후보가 공산 계열 후보에게 참패하면서 리콴유는 경제를 살릴 시장을 확보하고,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기로 결단했다.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70퍼센트가 넘는 찬성표를 받으면서 1962년 9월 싱가포르는 신생 말레이시아 연방의 연방의회 159석 중 15석을 할당받은 자치주로 새 출발했다.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싱가포르가 140여 년 만에 식민 지배 시대를 끝낸 것이다.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강제 축출당해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싱가포르 자치 정부와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라만 당시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 총리는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외치는 사람이었다. 말레이시아에는 자국 내 화교들을 적대시하는 반중국인 정서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따라서 중국계가 이끄는 싱가포르 자치 정부와 소수민족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리콴유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라만은 리콴유와 일절 사전 협의 없이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의 연방 탈퇴를 일방적으로 공식 발표해 버렸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제 독립’을 당하게 된 것이다.

유예 기간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격적으로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당한 리콴유와 인민행동당, 그리고 싱가포르의 미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국토는 서울보다 조금 더 크고 인구 1백만 명 중 중국계가 75.4%, 말레이계가 13.6%, 인도계가 8.6%에 종교도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이 혼재되어 대단히 복잡했다. 가장 큰 문제는 독립 국가로서 생존 여부 자체가 불투명했다는 것이다. 북쪽에는 싱가포르를 쫓아낸 말레이시아가, 남쪽에는 1억이 넘는 인구 대국 인도네시아가 싱가포르를 압박하고 있었다. 심지어 연방 탈퇴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탓에 1000명이 넘는 말레이시아 연방군이 싱가포르 내에 여전히 주둔하고 있었다. 마지막 안전판 구실을 해주길 희망했던 영국군은 1971년까지 전면 철수 방침을 싱가포르 정부에 통보해왔다. 그야말로 “지도에서 붉은 한 점에 지나지 않는” 도시국가가 실제 지도에서 지워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정부 체제”

세계적인 투자가 워렌 버핏이 운영하는 버크셔 헤서웨이 코퍼레이션의 찰리 멍거(Charlie Munger) 부회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치제도는 특정 상황 하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싱가포르의 정치제도”라고 말한다. 그는 “싱가포르 정부 체제가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성공한 정부 체제”라면서 “세계 정치사를 연구하려면 리콴유의 생애와 그의 업적을 연구하라”고 한 바 있다. 싱가포르는 어떻게 “특정 상황하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여 독립 30년 만에 ‘아시아의 4마리 용’의 반열에 오르고, 마침내 40년 만인 2019년에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서 발표한 국가경쟁력 1위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하고 나서 자원도 아무 것도 없이 종교, 언어도 다 다른 다민족 신생국가가 어떻게 통합된 나라로 일어설 수 있었는가”라는 이광재 원장의 질문에 임계순 한양대 명예교수는 중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공용어로 선택한 언어정책과, 인종과 민족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고 오로지 능력에 따라 발탁하고 업적에 따라 보상하는 싱가포르 특유의 실적주의와 업적주의 시스템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모든 민족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줘서 개인의 능력으로, 능력에 의해서 발탁되고 업적에 의해 승진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 싱가포르를 발전하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능력주의 성공적 결합

리콴유는 국민 통합의 기초 위에서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장점, 동양의 유교적 가치관과 윤리관을 잘 합친 싱가포르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임 교수는 “토지 등은 사회주의 공개념을 썼지만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자유경쟁, 효율, 기회균등 등의 요소를 플러스한 실적주의·업적주의가 독특한 사회체제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이렇게 동ᆞ서양의 정치와 가치의 장점을 고루 취한 독특한 사회 시스템의 기반 위에서 리콴유와 싱가포르는 별다른 자원도 없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이스라엘을 벤치마크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넘어 세계로 나가 글로벌 기업과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모든 제도를 거기에 맞춰 개혁”했다. 임 교수와 이광재 원장은 싱가포르가 지리적·지정학적·인구적 한계를 극복하고 글로벌 혁신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요인으로 첫째 정치 안정, 둘째 공무원의 역량과 자세, 그리고 교육과 의료 서비스 등의 사회적 환경과 양질의 노동력 등을 꼽았다. 정치적 안정은 예측 가능한 기업 경영과 투자를 가능하게 한다. 높은 수준의 교육과 의료 서비스는 삶의 질 확보를 위한 주요 요건이다. 임 교수는 그 중에서도 싱가포르의 관료와 공무원들의 자질과 역량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싱가포르의 장점은 훌륭한 인재를 공무원으로 가진 것이라고 할 정도로 공무원들이 교육수준뿐 아니라 능력도 뛰어나고 청렴결백하다”면서 “자질이 있는 학생들을 일찍부터 선발해서 국가 장학금을 주어 외국 유학을 보내고 지도력이나 팀웍은 물론 심리 상태나 체력까지 종합적으로 테스트해서 국가를 이끌 인재들을 선발한다”고 했다.

종속이론이 풍미하던 시대에
개방국가의 길로 달려가

1960년대 동남아를 비롯한 3세계 국가들에 종속이론이 풍미했다. 그러나 리콴유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유럽 및 미국과 직접 교역을 통해 발전을 꾀했고 세계적 기업을 유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외국 인재를 불러들였다.

임 교수는 “지도자들이 세계 흐름과 자신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했다”고 했다. “외국에서 자본과 기업을 데려오지 않으면 수입원이 없는 상황에서 싱가포르는 단계별로 진화해왔다. 처음에는 외국 기업, 그 다음에는 다국적 기업을 유치하고, 그 다음에는 기업들의 아시아 지역본부를, 그리고 최근에는 첨단의 지식과 기술 확보를 위해 세계 일류 기업들의 R&D센터를 유치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임 교수는 말했다.

외국 연구자들에 ‘오아시스 같은 환경’ 제공

싱가포르는 자국의 인재를 길러내고 외국의 자본과 기업, 그리고 기술을 유치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각 분야의 세계적 인재들을 영입하는 데 사활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첨단과학 분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연구 개발을 해야 하는데 싱가포르의 인재만으로는 세계와 경쟁할 수 없으니 세계 각 분야 인재들이 싱가포르에서 편안하게 오래 살면서 연구하고 연구 결과물들을 산업화, 상품화할 수 있도록 높은 보수를 지급하는 등 오아시스 같은 환경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고 임 교수는 말했다.

키신저 “많이 배웠다”
대처 “그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리콴유는 국제정세를 읽는 눈도 밝았다. 헨리 키신저는 “그는 총리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사상과 능력으로 미국에 필요한 친구가 되었다”며 “많이 배웠다”고 했다. 마거릿 대처는 1984년 홍콩 반환 문제로 덩샤오핑을 만나러 가기 전 리콴유의 자문을 받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우리 시대의 문제를 독특하고 명쾌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으며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는 중국의 지도자들과 돈독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염려했다. 2013년엔 중국 위협론을 역설하며 “미국이 아시아에서 중국의 군사력 경제력을 견제하지 않으면 패권국 지위를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위협에 대비
자국 군대를 해외 여러 곳에 주둔시켜

싱가포르의 현재와 미래가 온통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싱가포르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위험과 위협은 ‘안보’다. 남북 양쪽으로 인구 3,200만 명이 넘는 말레이시아에 포위되어 있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추방한 나라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이나 전쟁 가능성에 대한 걱정을 항상 안고 있다. 인구 600만 명이 안 되는 나라에서 정규군 7만여 명과 예비군 35만 명을 운용하고 있다. 노동력도 충분치 않은데 2년간의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 공군의 경우, 자국 영토가 너무 협소하고 유사시 공군 전력이 한꺼번에 망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나라들과 군사협정을 맺고 자국의 항공기 전력을 미국, 프랑스, 호주 등 해외 여러 곳에 주둔시키고 있다. 임 교수는 “싱가포르는 자신들이 처한 지정학적 위치나 국제적 위상을 잘 인식하고 대처한다. 중국계가 다수지만 중국에 너무 치우치지 않고, 반대로 미국이 반대해도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고 끊임없이 지도자들끼리 신뢰를 쌓고 관리한다. 중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인정했지만 대만과 군사협정을 맺고 대만 현지에서 군사 훈련을 할 만큼 대만과의 관계 관리에도 신경을 쓰는 등 다자 관계를 잘 활용하여 때로는 지도적 역할을, 때로는 지렛대 역할을 하면서 싱가포르의 국격을 높이고 외교 활동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고 했다. 이 원장은 “아세안 국가들과 연대해 공동 이익 협력 체제를 만들어 자기 이익도 지키고 공동의 이익도 확대하는 싱가포르의 외교는 동북아뿐 아니라 아세안으로 외교 활동 범위를 적극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싱가포르엔 황금기가 없었다
그래서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싱가포르가 한창 경제성장과 국가 발전을 위해 잰걸음 하던 1980년대 초반 싱가포르의 부총리를 지낸 라자라트남은 “싱가포르에는 과거를 되돌아볼 황금시대의 역사가 없어 미래지향적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리콴유와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연방에서 쫒겨나 ‘독립당한’ 작은 도시국가를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 임 교수는 『중국의 미래, 싱가포르 모델』에서 “아마도 리콴유를 비롯한 새 정부 지도자들은 전통에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독특한 환경에 맞도록 정치제도를 만들어 가면서 끊임없이 그들이 목표로 하는 국가, 즉 ‘다민족 사회이지만 실적으로 평가받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 지도상의 붉은 점에 불과한 나라가 아니라 ‘빛나는 붉은 점처럼 반짝이는 국가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리콴유와 싱가포르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알리바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 결과 리콴유와 싱가포르는 자신들보다 인구 대비 25배가 훨씬 넘는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으로부터 “중국에 싱가포르 같은 도시를 1,000개 만들고 싶다”고 부러움 섞인 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독립일인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가 말레이어 국가나 중국 국가, 인도 국가가 아닌 각 종족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들의 언어·문화·종교를 가지는 능력 위주의 동등한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들에 대한 선언이자 맹세였다. 그는 이것을 거의 지켰다. 고촉동, 리셴룽으로 이어지는 후계 체제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통치철학 분명한 현실주의자

리콴유는 생전 “정치는 운동경기 팀처럼 스스로 실행의 당위성을 느껴 생명을 바쳐 하는 것이지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통치철학이 분명한 현실주의자였다. 그가 존경하는 정치인도 덩샤오핑, 처칠, 드골이었다. 그는 유교적 엘리트주의자이기도 했다. “어느 사회든지 약 5%는 일반인 보다 신체적·정신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한 일도 있다. 그는 공무원들에게 능력과 덕망과 책임감, 청렴을 요구했다. 열정과 냉철한 현실감각을 갖춘 엘리트들이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가로 고위 공무원들의 급여를 변호사나 CEO 급여의 3분의 2선으로 높였다.

대한민국은 싱가포르, 중화민국, 홍콩과 더불어 한때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렸다. 그중 싱가포르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경쟁력을 갖춘 나라로 도약했다. 대한민국은 G20 및 OECD의 일원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리콴유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대전환기의 설계자들]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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